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 전 (1975. 5. 6 - 5. 24 東京畵廊)

Critique 평론 2007. 5. 12. 10:11
韓國 5人의 작가, 다섯개의 흰색
- 白 -

中原佑介
나카하라 유스케




한국 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 전 (1975. 5. 6 - 5. 24  東京畵廊) 나카하라 유스케의 서문
1975년 5월 15일 弘大學報에 개제된 번역글

* 원문의 초략, 중략 부분을 보완 수록함 - 안원찬 譯
*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Vol. 1(ICAS, 2003)에서 발췌
(출처: http://cafe.naver.com/haeto/711)





  우리에게 있어 白色은 단순한 하나의 「빛깔」이상의 것이다. 그 「白」을 주제로한 한국 現代美術이 일본에서 대규모 전시되고 있다. (東京畵廊․5월6일~24일) 李東熀 徐承元 朴栖甫 許榥 權寧禹 5人作家의 「다섯개의 흰색展」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現代美術이 일본畵壇에 진출, 보다 활발하고 적극적인 發言을 하고 있는 것은 실로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여기 일본의 미술평론가 中原佑介씨와 本校 李逸교수의 評을 실어본다. <편집자註>


  어느 나라이건 한 나라의 현대회화의 특징을 요약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오늘의 한국현대회화 전반의 특징을 요약하는 일도 지극히 어렵다. 한국의 현대미술 동향에 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는 나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본 바로도 거기에는 이러저러한 다양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60년대 전반에는 앙포르멜 조의 뜨거운 추상의 전개가 있고 후반이 되면, 더욱 젊은 세대가 사물과 이미지와 같은 문제에 초점을 맞춰 이른바 차가운 눈으로 회화를 향한 태도가 농후하게 나타난다. 구미나 일본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일종의 평행현상을 볼 수 있다 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점은 한국 현대회화가 모두 구미와 같은 콘텍스트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느 화가들 작품에는 다른 나라 현대회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특질이 현저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1973년 봄.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고 몇몇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中間色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화면이 지극히 델리케이트하게 마무리져 있는 繪畵가 눈에 띤다는 印象을 받았다.

  中間色을 사용한 델리케이트한 畵面이라는 인상은 그후 두차례에 걸쳐 한국에 들러 화가들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동안, 그것이 단순히 造形 기교가 아니라, 그 어떤 繪畵 사상의 表明이라고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다. 물론 한국의 모든 화가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느끼게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몇 사람이기는 하나 그러한 特質을 현저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개인 감수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을 뛰어넘은 그 무엇인가에 의거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번 전람회의 다섯 화가들은 그 의도나 방법에 있어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들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差를 넘어선 공통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白色」이 작품을 결정짓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白色」이 한국 미술에 있어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자상치가 않다. 그러나 이들 화가의 작품을 볼 때, 「白色」이 화면의 색채로서의 한 要素가 아니라 繪畵를 성립시키는 어떤 근원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형태라든가 색채는 그「白色」속에서 태어나고 다시 그「白色」속으로 사라진다. 「白色」은 비전의 母胎인 것이다. 우리는 白色 모노크롬(單色)의 繪畵를 알고 있으며 또 白色을 基調로 한 繪畵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들에 비해 여기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색채를 「減」해서 생긴 흰 화면도 아니요, 형태를 배제하고 난 극한으로서의 흰 空間과는 전혀 異質的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白色」은 도달점으로서의 하나의 색채가 아니라 宇宙的 비전의 틀 그 자체이다.

  逆說的으로 들릴지는 모르나, 이들 다섯 화가의 공통점인 「白色」의 특질은 오히려 그 특질을 「白色」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눈앞에 보는 것은 흰 大海로부터 모습을 나타냈다가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現象으로서의 색채이자 형태이며 白色이 그 색채라든가 형태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존재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水墨畵의 흰 空間의 전통과 이들의 작품을 연결시킨다는 것도 하나의 視點일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白色」이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보다도, 그것이 現象의 生成과 消滅의 母胎라고 하는, 말하자면 時間을 잉태하고 있다는 느낌이 주어진다는 점에 있다. 이들 畵面이 특정된 焦點을 가지지 않고 미처 걷잡을수 없는 構造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권영우와 박서보는 이들 5인 가운데 가장 위 세대에 속하면서, 전자는 종이를 찢고 후자는 연필로 그린다는 기법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반복이라는 행위의 공통성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 반복이 화면 위에 각인 되어서 드러나게 된다. 權은 화면에 종이를 붙이고 아직 젖어 있을 때에 손가락으로 짓눌러가며 그것을 파손해 간다. 이리하여 그것이 음영의 기점이 되어 화면 전체로 확대된다. 한편, 朴은 하얗게 칠해진 화면 위에 아직 물감이 마르지 않은 동안, 연필을 격렬하게 달리게 한다. 당연히 朴의 작품은 그 다이내믹한 필촉이 두드러지지만, 이들 두 화가의 작품은 「白」의 모태로부터 무엇인가를 생성하기 시작한 원초적인 광경이라 할만한 것을 느끼게 한다. 카오스와 질서의 혼재다.

  서승원은 기하학적인 패턴을 그린 것에 특징을 발견할 수 있지만, 비교적 색채가 풍부한 이들 도형은 「白」의 모태로부터 물리적인 결정작용에 의해 태어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흥미롭다. 아니면 규칙적인 구조를 지닌 광물의 세계라고나 할까? 이와는 대비적으로 허황의 부정형 형태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한 화면에는 유기적인 무엇인가의 생성과 소멸을 암시하는 것이 있다. 허황은 또 하얀 오브제를 발표한 적이 있는 작가지만, 근작일수록 그 기묘한 형태는 「白」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특징을 강조한다.

  이동엽은 이 5인 가운데 나이가 가장 적은 작가지만, 이들 4인과는 작품이 완전히 다르다. 李의 작품은 물체의 소멸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컵이나 그 안에 떠 있는 얼음을 그린 작품에는 아직 물체의 윤곽이 확연하지만, 서서히 물체는 윤곽을 잃고, 근작에 이르러서는 무엇인가의 존재를 암시할 뿐인 더욱 작은 선만을 그릴뿐이다. 그것은 형태라기보다는 짧은 순간의 현상 자국이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릴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視界로부터 멀어져 가는 듯한 방향성을 느끼게 한다. 「白」의 모태로의 회귀다.

  「白色」이라는 문제만으로 이들 다섯 화가들만이 한국 화가의 특질을 독점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옳은 이야기가 못될 것이다. 다만 나는 거기에서 전형적인 例를 보고 있다. 한국의 現代繪畵가 가져다준 이들 白色의 繪畵는 주목할만한 유니크한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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