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 <존재의 근원과 명상에 의한 직관적 공간>

Critique 평론 2003. 6. 6. 13:24
존재의 근원과 명상에 의한 직관적 공간

고충환 (미술비평)



이동엽의 그림은 아무런 형상도 없는 텅 빈 화면 위에 최소한의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러나 넓은 평(평)붓을 사용하여 수평으로 긋거나 수직으로 그어 내리거나 곡선으로 휘돌린 그 선은 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면에 가깝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선, 필, 획에 속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으로는 하나의 면으로 보인다. 이는 실제(선)와 그 실제가 드러나 보이는 현상(면)과의 차이를 말해준다. 여기서 시각이 의존하고 있는 현상이 감각요소에 속한다면, 실제는 관념요소에 속한다. 시각은 외계를 자기의 안쪽으로 불러들이는 일종의 감각 코드인데 반해, 실제는 선험적인 것으로서 감각 코드에 붙잡히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추론과 추상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두 영역(실제와 현상)은 그 차원이 다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만날 때에만 온전한 인식과 지각작용이 가능해진다. 즉, 세계에 대한 관계와 경험이 가능해진다.

또한 선과 면과의 경계가 모호한 데에는 회청색과 황갈색 등 채도가 낮은 색조도 그렇거니와, 더불어 그라데이션 기법으로써 색조의 일부가 화면의 흰 바탕색에 스며들게 한 방법에서도 기인한다. 여기서 그라데이션 기법에 의해 점차 진해지거나 반대로 엷어지는 색조의 변화는 모든 존재를 변화하는 시간적 존재로 보는 작가의 개념이 반영된 것으로서, 생성과 소멸에 이어진 존재의 순환원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경계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서보다는 나와 세계와의, 실제와 현상과의 관계처럼 선과 면, 작가와 화면, 주제와 객체가 서로 조응하는 유기적인 관계를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화면과 이렇듯 하나로 조응한 선이 화면에 일말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자석이 흩어져 있던 철의 입자들을 한자리에 모으듯 하나의 선은 잠자던 화면의 입자들을 부산한 움직임으로 들뜨게 한다. 그러고 보면 화면으로부터 돌출한 선은 그 자체가 일종의 에너지의 축인 것이다. 이는 그대로 무심한 화면에 유심한 작가의 인격이 개입한 흔적이며, 그리고 그렇게 개입된 만큼의 에너지(일종의 기와도 같은)의 질량을 보여준다.

인격의 이러한 개입은 작가의 그림이 비록 미니멀리즘(인격이 배제된 리터럴 오브제 곧 중성적인 물체를 가정하는)과 닮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와는 다른 원천에 기대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평면(성) 자체를 그 평면의 입자들이 균일하게 분포된 정적인 화면으로 이해한다면, 비록 그 입자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지만, 이 에너지 막대의 출현에 의한 유기적인 화면은 최초의 평면(성)을 변질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평면(성)에 천착한 것 같지만, 사실은 탈평면(성)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수질료 차원으로 환원된 평면(성)은 거부하면서도, 순수관념 차원으로 환원된 평면(성)은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순백의 텅 빈 화면이나 백색 자체가 상기시키는 순수한 원형, 세계의 본 모습, 원초적인 지대(태허), 존재의 근원, 무(무)의 지대, 그리고 무(무)와 허(허) 같은 일종의 문학적인 메타포를 인정하는 식이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과 모더니즘(회화가 가능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평면을 가정하는)과의 관계, 모노크롬(모든 문학적 서사가 배제된 무작위의 행위를 가정하는)과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의 일정한 차이에 대해서는 이러한 맥락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이동엽은 화면과 하나로 조응하는 과정 속에서 화면과 일체가 된다. 이를 위해 작가는 기다린다. 화면이 그 우연한 순간을 드러내고, 화면에서 그 긴장의 정도가 정점에 이를 때까지. 이처럼 완전한 긴장감을 실현한 화면은 단순히 화면 위에 그어진 정지된 선에 머물지 않고, 일종의 내재율이랄 수 있는 파장(파동)을 불러일으켜 화면 전체를 미세한 울림으로 떨게 한다. 일종의 정중동(정중동, 침묵의 한 형식인)의 원리를 실현한 것이다. 이러한 떨림은 특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붓질을 중첩시킨 그림에서 더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그어진 선의 에너지 축으로부터 촉발된 파동은 화면의 경계를 넘어 화면이 놓여질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 이 모두를 유기적인 전체로서 아우른다. 작가는 화면과 자신의 신체, 그리고 공간의 조응 관계를 공명(공명)이라 일컫는다. 이는 그 관계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뜻이다. 특히 작가에게 있어서 공명은 작업의 과정이기 이전에 삶의 원리이며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이러한 공명의 원리를 찾아가는 한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그만큼 작가의 작업을 관념적이고 심의적이며, 그리고 금욕적으로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한편, 선 그 자체는 사실 실체가 없는 한낱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물과 사물, 형태와 형태, 면과 며니 서로 접해 있는 경계를 선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물, 형태, 면 중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서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결국 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신, 관념의 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선이 어떠한 질료적 매개도 통하지 않는 순수 관념의 산물은 아니다).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선은 이렇듯 사물과 사물, 형태와 형태, 면과 면과의 사이와 틈새 그리고 경계로 나타나며, 그 자체로는 없는 것이지만 그것 없이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해진다.

작가는 선, 사이, 틈새, 그리고 경계를 무의 공간, 허의 공간, 여백의 공간으로 일컫는다. 그리고 이러한 빈 공간이 없다면 세계도 없다고 본다. 결국 빈 공간은 그 자체 비어 있는 것이기보다는, 비록 감각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실체를 부인할 수도 없는 호흡과 숨결 그리고 기의 입자들이 하나의 결로 흐르고 있는 소요(소요)의 공간인 것이며, 생명의 공간인 것이다. 말하자면 관념적 실체로서의 빈 공간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한다면, 감각적 실체로서의 빈 공간은 세계 자체를 존재케 하는(세계 자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근원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유기적인 공간 개념은 모더니즘의 질료적인 공간 개념이나, 그 평면의 인식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무와 허 그리고 여백에 근거한 공간개념도 그러하거니와, 작가는 비록 아크릴과 캔버스를 재료로 하면서도 그리는 방법만큼은 현저하게 전통적인 화법을 따른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화면에 칠해진 안료 층이 미처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붓질을 반복 덧칠함으로써 마치 동양화에서의 종이와 먹이 일체를 이루는 것처럼 색조와 화면이 하나의 결로 스며들게 한다.

물론 사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작가로 하여금 사물과 형태 그리고 면을 넘어선 어떤 것에, 즉 감각적인 실체를 넘어선 관념적 실체에, 유의 경계를 넘어선 무의 지대에, 현상의 경계를 넘어선 원형적 실체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경계 저편에서 건져 올린 것들을 유기적인 흐름 속에 존재케 한다. 물, 바람, 공기, 호흡, 숨결, 기와 같은 질료적 실체는 물론이거니와, 기억, 회상, 상념과 같은 관념적 실체와 함께 심지어는 사계(사계)와 같은 절기(작가는 특히 녹색과 청색, 보라색과 노랑 색 등 원색의 스펙트럼으로 계절의 변화에 따른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회청색이나 황갈색으로 표현된 보다 관념적인 그림들과 차이를 두기도 한다)마저도 흐름 속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은 경계가 없다는 것이며, 탈경계의 이러한 인식 자체는 선으로부터 촉발된 사이와 공간 개념을 유기적 실체로 이해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가하면 선, 사이, 틈새, 그리고 경계에 대한 유기적이고 관념적인 인식은 작가의 그림을 일종의 일루전과 상징적 표상으로 보게 한다. 그러니까 수평의 스펙트럼은 대지와 물질 그리고 수평선과 지평선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수평선과 지평선 자체는 원래 그 끝이 선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의 일루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시 하나의 가상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선이나 사이에 대한 인식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일루전에는 수평선과 지평선 저편의 어떤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는 듯한 염원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무한존재에 대한 기원은 그대로 생명이나 정신을 상징하는 수직의 스펙트럼에로 이어진다. 이렇듯 수평과 수직의 스펙트럼이 관념적 실체를 암시한다면, 곡선의 스펙트럼은 불과 물 그리고 바람과 같은 보다 유기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에 가깝다. 이 모든 실체는, 소멸돼 가는 모든 현상적인 것들과 감각적인 것 너머에 있을 본질적인 존재를 꿰뚫어보는 작가의 직관을 느끼게 한다. 이로써 이동엽의 그림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로서의 평면회화에로 환원된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를 범 우주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비전을 담아내기 위한 일종의 사유의 그릇으로 보고, 그 직관적 공간을 그린 것이다.



ref. 2003년 서울 카이스갤러리 이동엽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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