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존재적 명상과 순환>

Philosophy 철학 2008. 3. 25. 21:59
이동엽
DongYoub Lee


존재적 명상과 순환




오늘날 철학과 종교는 인간의 진화에 기여하는가?
다만 한 가닥의 상징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진실로 참다운 존재의 실천은 무엇인가?


20여 년 전 자서에 썼던 말인데 요즘도 종종 생각하게 되는 물음이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진화했다고 믿는 인간의 영혼, 그러나 인간의 삶은 지금 어느 지점에 닿아 있는지,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테러, '성전'이라는 이름의 전쟁, 기아, 인간 의지로 극복하지 못한 이 모든 혼돈의 세계를 직시하며 동양의 우주적 자연관을 사유한다. 나는 백색(백색) 화면을 빌어 의자연(의자연)의 세계를 제시한다. 백(백)은 존재의 근원적(근원적) 지대로서, 단순히 물질적 공간이나 눈에 보이는 가시(가시)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정신(정신)의 대지이며 자연이다. 또한 흰 공간은 의식의 여백이며 현상의 빈터, 즉 '무(무)의 지대'이다.

모든 존재 현상은 빛과 어둠, 혼돈과 질서, 충만과 공허, 음과 양의 양면성을 지니며 이것은 우주의 순환과 균형, 생명의 본질이다. '밝음이요 빛'인 흰 공간, 그곳은 존재의 대지 또는 존재의 출처로서 생명의 바다이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세계의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 형태의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순환의 고리, 자연의 숨결과 진동을, 그 생명적 공간과 시간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태(태), 그것은 무상(무상)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우주 속에 육화(육화)하는 물질과 행위의 일체화 즉 합일의 세계를 이루고자 함이며 그것은 자연의 의지로서 그 순환의 원리에 밀착하는 인간정신, 의지이다.

나는 흰 공간에 붓질을 한다. 화면과 상(상)을 하나의 몸으로 의식하기 위해 나는 늘 흰 바탕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선을 긋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동양화를 그릴 때 쓰는 넓은 평붓을 사용한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바탕과 같은 흰색을 칠하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붓질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붓과 물감이 화면에 젖어들고 흰 하면과 이어진 일체(일체)의 선으로서의 붓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붓의 한쪽 끝은 짙은 색으로 안쪽은 엷은 색으로, 흰 바탕과 물려 있도록 톤을 조절하여 그린다. 최근에는 하나의 붓선을 그어내린 다음 붓을 뒤집어 생체(생체)의 골격처럼 대칭으로 맞대어 나란히, 또는 수평선을 이루는 좌우대칭으로 긋는다.

나의 붓질은 유연성 있는 물감이 바탕에 잦아들고 섞이면서 모필에 의한 미세한 변화를 촉발한다. 붓 자국과 붓 자국은 서로 맞닿아 상호 교화하고 의지하면서 미묘하게 발생한다. 즉 화면에서 촉발되는 우연성과 나의 의지에 의해 적절한 교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꽤 까다롭다. 수직으로 긋는 의지가 작용하지만 붓이 맞닿아 물감이 서로 섞이면서 미세하게 변화해 가는 톤은 우연과 자연(습도 등 기후)의 반응에 의해 그려지기 때문이다. '물(물)의 정신화'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물질감을 가능한 제거하며 생경한 붓의 필세와 물감의 양을 줄이면서 붓질을 반복한다. 마치 소의 되새김질처럼. 그리하여 물(물)과 정신이 만나 서로 화학반응이라도 하듯, 붓선은 자신의 무게로부터 벗어나 상승하듯이 공간으로부터 투명해지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고 흰 공간에 하나의 획을 긋는다. 나와 세계를 일체화하고 공명의 공간을 형성, 하나의 생명(공간적 신체)을 부여한다. 사라지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순환의 고리, 존재의 무상성을 드러내는 붓질로 자연계의 공명적 구조를 열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ref. 2008년 1월 31일 - 3월 23일, 그림의 대면(Inter-viewing Paintings) 전, 소마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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