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 작가대담 - 이동엽

Philosophy 철학 2003. 5. 12. 10:27

오상길: 오늘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선생님 대학 재학당시의 수업과정이나 내용들에 대해서 좀 여쭤볼까요?


이동엽: 주로 모델 수업, 풍경화, 정물화 같은 기초 실기였지요.


오상길: 그러면 1972년 1회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셨던 컵 시리즈는 대학에서의 수업과는 거리가 있는 작품이었군요.


이동엽: 예, 전혀 동떨어지죠.


오상길: 대학에서의 수업에 만족하시지 않으셨군요?


이동엽: 거의 구상화 위주의 기초적인 실습과정이었으니까… 전혀 별개의 것이었죠. 수업시간이 끝나고 나면 다른 그림을 그렸어요.

  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구미술사 위주의 미술교육이 크게 잘못됐다고 생각됐어요.


오상길: 컵 시리즈 작품을 제작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이동엽: 그때 수업내용도 그렇고, 화단의 양상도 내겐 와 닿는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어떤 문제 의식과 어떤 지표를 가지고 작업해나가야 할까 몰두했어요. 예를 들면,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어떤 물건을 본다든지 하는 주위 사물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런 것이 있었어요. 여기 지금 앞에도 주스 병이 있지만 라벨을 떼서보자는 식이지요. 말하자면 사물을 둘러싼 포장을 벗겨내고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였어요. 모든 것을 순수한 원형으로 되돌려봐야 사물의 본모습, 세계의 본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오상길: 그 작품은 당시 화단의 분위기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독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간결하고, 단순하면서 명료한 것이었는데… 이 작품이 소위 70년대 한국의 백색 모노톤 현상의 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 양식적인 면에서의 특성은 어떻게 발상 되었습니까? 원래 간결하고, 깔끔한 것을 선호하셨습니까?


이동엽: 아니지요, 문제의식을 가지기 전에는 거의 서양화를 답습하는 정도였어요. 당시의 그런 시각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어요. 당시에는 물감도 별로 없었는데 흰색은 분량도 많고, 싸고 해서 흰색 그림을 그리기가 용이한 점도 있었지만, 물론 단순히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어요. 또 조선 백자의 세계와 연관지어서 이야기하는 사람도 나중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성장기는 어두운 피난시절이어서 집안이 떠돌아다니는 형편이었으니까 정상적인 문화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자 같은 것은 본 적도 없고, 미술시간에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정도였죠. 오히려 해외정보가 유일한 것이었는데,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주로 헌 책방에서 외국 서적을 보면서 감각을 취득하기도 했어요. 그런 잡지를 통해서 중고시절에는 감각적으로 그리스 흰색 흙집이 그렇게 신비하고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완전히 서양화를 답습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고있는 백색 그림을 보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원색을 사용했었어요. 거의 야수파적인 색채와 기법을 사용했으니까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흑백으로 차려입은 한 여인을 봤는데, 색채 중에 흑백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나 깊고 완벽하게 보였어요. 그리고 상도동의 산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는데, 비가 갠 어느 날 산허리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가는 사람을 보게 되었어요. 마치 흰 점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옛 시절에 저런걸 보고 신선이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흰빛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에서 흰색은 뭔가 특별한 신성함을 느끼게 되었지만, 사실 그런 경험이 컵 시리즈를 하게 했던 직접적인 동기는 아니었고, 다만 흰색이 그렇게 감각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는 얘깁니다. 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것을 원형으로 보고자하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문제에 부딪히고, 고통받으며, 갈등하게 하는 문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심리적으로 크게 작용했었지요. 그리고 사실 그런 심리적인 부분보다는 시각에 대한 문제가 컸어요. 그 당시에 많이 읽혀졌던 헤르만 헤세… 우리가 알 듯이 인도에서 어린 시절을 살고, 동양을 여행하던 작가였는데 그런 시각 때문이었는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속에서 나를 자극하는 것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흐르는 물 속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물체가 있어 실제로 가서보니 쇳조각이었더라 하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세계를 보고, 또 사물을 보는 것에 대한 자각이 오히려 이런데서 싹이 트였어요. 그 당시에는 우리가 배우는 것들이 근세의 취약점만 배워왔지 동양사상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한마디로 지적인 경험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던 중 대학시절 우연스럽게 문고판으로 나온 노, 장자나 인도 타고르의 시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읽게 되었는데 이런 것들도 사고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헤르만 헤세는 “최고의 쾌락과 최고의 고통은 맞먹는다.” 라는 얘기했는데, 나는 물리적인 힘이든 그 무엇이 최고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그 정점은 무엇이고, 그 선을 넘었을 때 그곳은 어디인가? 이것이 무無의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최고의 상태로 올라갔을 때 그것의 운동은 제로의 상태로 드러나지 않겠느냐 하는 거죠. 좀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고를 하면서 제로의 상징으로 백색을 지표로 삼았다고 할 수 있어요. 얘기가 좀 거창하지요?


오상길: 당시 《앙데팡당》에 출품되었던 컵 시리즈가 《파리 비엔날레》 국내작가선정 평면부문에서 1석을 차지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해 동경화랑 야마모토 사장이 상당히 관심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 관심이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동엽: 후에야 알게되었지만 야마모토 사장은 우리 나라 고미술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동경화랑에 초청 받아서 야마모토 사장 집에서 기거했던 적이 있는데, 야마모토 사장의 부인 얘기로는 야마모토 사장이 오래 전에 한국에 있었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리고 동경화랑에서 한국의 목가구 등 각국의 골동품점을 따로 하고 있더군요. 이런 저런 사실로 유추해볼 때, 그가 우리의 전통미에 연관을 지어서 보았겠구나 하는 추측을 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백색을 여러 번 묽게 칠했을 때 나오는 투명한 맛과 또 그때는 재료가 없다보니 옵셋 잉크를 썼는데, 그 잉크는 아주 투명한 맛이 있어서 그런 우연한 재료의 성질들이 일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투명한 바탕 위에 그려진 컵의 선이 뭔가 칠해 졌다기보다는 베어든 것 같고, 투명과 반투명의 느낌이 나오는 것에서 야마모토가 볼 때는 도자기의 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마침 흰색이니까 <무상-상황 가,나,다> 중 <가>, <다>는 흰색, <나>는 검은색 백자와 연관지어 생각한 것도 같고요. 그리고 컵 시리즈에서의 기법이나 조형을 소박하면서 단순하고, 순박하게 보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동엽, 상황 ABC


無像 - 상황 ABC

1995

162[1].2x130.3cm

Acrylic on Canvas






오상길: 야마모토 사장에게 직접 들으신 겁니까?


이동엽: 심사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들은 것은 아니고, 심사에 참관하시고 지금은 작고하신 평론가 이일 선생이나 명동화랑 김문호 선생을 통해서 들었어요. 허황씨도 흰색의 미묘한 색조의 그림을 출품했기 때문에 같이 연관지어서 말씀을 하셨을 거예요. 명동화랑은 동경화랑과 전시 협조관계가 있고, 당시 제 작품에 대한 일본측 관심은 『현대미술』지 편집을 맡으셨던, 평론가 유준상 선생이 잘 알고 계실겁니다.


오상길: 컵 시리즈 이후에 선생님 작품에는 부드럽고 유동적인 형태와 딱딱하고 고정된 듯한 형태들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컵 시리즈에서 보였던 컵이나 얼음 같은 구체적이고 재현적인 이미지들이 사라지면서 화면은 더 단순화되었고, 선이라는 순수 형태들로 대체되는데 이것을 어떤 필연적인 일련의 변모 과정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이동엽: 예.


오상길: 그런 부드럽고 유동적인 형태와 딱딱한 형태를 같이 배치시키는 이유는 뭔가요?


이동엽: 서로 다른 구체적인 형태는 컵 시리즈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얼음의 성질이나 유리컵이라는 투명체는 요소적으로 연관되어있어요. 평소의 관심은 물水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에요. 물의 투명성, 수용성, 수평성, 변형성, 반영성… 물, 공기, 빛…. 그러한 요소, 이미지에 관심이 가장 컸습니다. 예들 들어 바람으로 나타난다든지… 구태여 설명하자면 부자연스러울지 몰라도 수평으로 그어진 것은 수평선 혹은 대지라고 설정했고, 곡선 같은 것은 불, 물, 바람으로… 단지 그런 것들이 단순화된 것인데, 이미지라는 것이 그릴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 때문에 더 단순화해서 그리게 된 것 같아요. 그러면서 더 본질적인 요소. 유기적인, 무기적인 요소에 근접하고자 했죠. 그리고 컵 시리즈에는 백색과 흑색 바탕에 컵 같은 오브제적인 형태도 중요하지만 얼음이 녹아 컵이 비워지는 시간성이 중요합니다. 세계를 어느 한 시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개념이 있고, 채워지면 비워진다는… 음과 양이라고 할까요? 있다가 없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러한 개념으로 세계를 보고자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오상길: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 있어서요. 1970년 1회 《AG》전에 세 덩어리의 얼음을 빨간 통에 설치했던 김구림 선생님의 작품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1959년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구체파 작가의 작품 중에 유사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들을 보면서 존재와 부재의 과정에 개입되는 우리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에 주목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음이라는 사물은 녹아 없어지는 독특한 성질을 갖기 때문에 그 현상에 대한 관심은 얼마든지 공유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흔히 누가 누구의 것을 보고했느니 하는 따위의 발상적 차원에서의 유사성과 모방에 관한 논란은 소모적인 유치한 태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얼음이라는 존재가 고체에서 액체로 그리고 다시 기체로 기화하는 독특한 사물이기 때문에, 그것이 변화하는 현상에 대해 존재와 부재의 관념적인 연상이랄까?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무상함 같은 심정적인 감상들이 개입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발상에 있어서의 재료나 아이디어 공유는 흔히 있는 일이고, 또 그것이 정작 현대미술의 맥락이 지향하는 문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유사성이나 모방에 대한 논의가 심도를 더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선생님의 작품과 김구림 선생님의 작품은 그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경우도 모티브라는 맥락에서 얼음의 존재와 사라지는 과정에 관한 어떤 관념이나 감상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동엽: 글쎄, 《AG》전 때는 구체적인 그런 생각은 못해봤어요. 저도 당시 김구림 선생님의 작업을 보았는데, 신선한 것이었다는 기억이 있어요. 컵 시리즈 이후 생각해 보니 자연의 질서와 순환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 또한 마음의 현상을 담는 것이 내 작품의 주개념이라 생각했지요.


오상길: 이제 선생님 작품에 등장하는 선線의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도록 할까요?


이동엽: 그 이전에 먼저 덧붙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제가 물水에 대한 생각이 컸다는 부분에 관한 거예요. 저는 정읍에서 태어나서 부산에서 자랐는데, 부산 태종대에 나가서 아름답고 거대한 바다와 수평선을 경험한 것… 최초로 경이롭고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고교시절에는 미술대회 같은데서 수상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당연히 미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대학에 대한 꿈보다 바다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었어요. 8살에 폐허가 된 서울 용산으로 이주해서 살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계시는 지리산 동학골에 갔다가 그곳에서 산골의 기가 막힌 샘물을 보았어요. 푸른 이끼 사이로 쏟아지는 물, 그곳에서 물고기도 잡고… 그런 경험에서도 물에 대한 강렬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물이 주는 깊은 의미가 어느 순간에 툭 떠오르더라구요. 그것을 이제는 오늘날의 오브제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전통 동양화에 담을 수 있는 양식일 수는 없었으니까… 투명성과 유동적인 사물에 대한 관심이 컸죠.


오상길: 그렇군요. 선생님 작품에서 보게 되는 선적인 이미지는 사실 선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외형이 뚜렷하지 않고, 한쪽은 끊어지고 다른 한쪽은 여백으로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들어 그 굵기도 더 커져 있습니다. 사실 선의 개념은 점과 마찬가지로 면적이 없어야 하지만, 면적이 없이 시각화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선은 어디가지나 관념적인 것입니다. 때문에 선생님의 작품에서 보게되는 선이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한정지어서 볼 것인가 하는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이 점을 유보한다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뚜렷한 외형을 가진 선과는 구분되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저는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모호한 이 독특한 선의 존재구조와 존재방식이 편평한 화면의 구조와도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호함은 캔버스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는 식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국면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화면으로부터 때때로 아련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분위기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다소 비약되는 표현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동양적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동엽: 나는 서구인은 도저히 할 수 없는 동양인의 존재관에 의한 그림을 그동안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70년대 후반에 들면서 점점 직선화 됐어요. 어느 날 무엇을 그릴까, 그릴 수는 있는 것인가… 뭔가 막연함 속에서 떠올라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내 속의 자발성이 드러나서 뭔가 되어주지 않을까 해서 막연함 속에서 작업을 했죠. 어떤 화가는 앞에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면서 도저히 그런 풍경화를 그릴 수가 없어서 펑펑 울었다고 해요. 물론 나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도저히 그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 선생이 앞에서 적절하게 선에 대한 얘기를 드러내주었지만, 저는 선을 하나 긋는데 선이 선의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상길: 왜 그렇습니까?


이동엽: 그건 요소에 불과한 것이고, 기존의 평면성밖에는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이죠. 선이 하나의 요소로서 선이어서는 안되고, 세계가 되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요. 평붓을 사용해서 선을 긋는데, 한쪽 끝에서 안쪽으로 점점 바탕색과 섞여져요. 물론 붓 자체에도 그런 색배분이 있지요. 그것을 그어 내렸는데 역시 선적인 것이 남는 것 같더군요. 그 전에도 그러한 선을 그었지만 당시는 선이 선으로만 드러나지 않고 화면과 같이 드러나는… 선은 사실 임의적인 것 아닙니까? 대상을 윤곽 짓는다면 그것은 항상 임의적인 것입니다. 대상은 그렇게 선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공간적인 깊이도 있고… 그렇게 평붓으로 선을 그었으면 한쪽은 선으로 나타나고 한쪽은 면으로 스며드는데, 그 붓을 뒤집어서 반대쪽에서 다시 그으니까 마치 바탕과 한 몸이 된 듯 하더라고요. 손바닥을 마주 치니까 소리가 나는 것이고, 그때 공간의 몸체로 구성되는 것처럼… 좌우가 대칭으로 되어 있는데, 복카시로 해서 맛을 낸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있다가 둘이 합쳐지니까 한 쌍이 되면서 마치 하나의 생명체가 되듯이… 말하자면 척추가 반쪽만으로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우연치 않게 거기서 절묘한 기쁨을 느꼈어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동양사상에서의 일체론, 몸과 마음의 균형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오상길: 우리 나라의 현대화 과정에는 특수한 역사적 국면이 있지 않습니까? 일제에 강점되면서 왜곡된 근대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이것을 근대화 과정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시기적으로나 양상 면에서 근대화 과정에 해당된다고 할까요? 어쨌든 해방 후 6․25를 거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상처를 입었고, 남북으로 분단되어 남한은 미군정 하에서 친미정권을 수립하게 됨으로써 사회는 미국문화로부터의 강력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게 됐습니다. 1957년 《현대미협》 3회전부터 비정형회화 양식을 집단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상당수의 비평가들과 미술사가들은 이 시기를 한국현대미술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의 입장은 작가들의 활동이 반反국전 선언 등과 관련한 집단적인 운동성을 띠었다는 사실과 서구미술 양식의 직접 수용이라는 측면을 소위 한국현대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서양미술의 양식을 수용하고 공유함으로써 외형적으로 서구미술의 조류에 편승해나가는 양상을 ‘현대화’의 근거로 볼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의구심을 갖습니다. 단색조 회화집단의 평면논리라든가 모노톤이라는 일련의 특성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구의 경우 평면성의 천착과 추상에의 도전은 그들의 재현적 전통회화의 비판적 해체와 극복을 위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개념입니다. 이러한 이슈를 ‘현대화’의 조건이나 강령처럼 단지 선택하고 수용함으로써 ‘서구미술의 현대화 과정’에 합류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러한 역사적인 비약 위에서 이루어진 운동들과 그 결과로서의 작품들 속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동기와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파열들과 그에 관한 낯선 가치의 생산 같은 것들에 관한 인식입니다. 예컨대 그것은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질적인 요소 같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구미술맥락에서의 평면성은 회화의 본질에 관한 존재론적 자기규명이라는 회화의 자기 동질성 확인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문제가 개입될 수 없었던 반면, 이것을 선택한 한국의 작가들의 문제의식은 화면 속으로의 침투라든가 여백의 개념 도입, 물감이라는 매체의 물성적 특성에 관한 인식 등 서구미술 맥락과 구별해야할 이질적인 요소들에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문화적인 감성이나 기질적인 특성들과 서구의 미술양식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국면들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구문화에 영향을 받은 제 3세계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혼성문화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상들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는 변형된 서구문화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색동과 댕기머리 같은 외부 세계로부터 받아 왔던 여러 가지 영향 중에 하나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색동과 댕기머리가 몽고의 그것과 사뭇 다른 것으로 정착되었듯,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변해 가는 문화적 맥락에서 미술의 가치를 읽어갈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작품에 등장하는 선의 개념이나 선을 처리하는 방법을 통해서 저는 관념적인 간격과 시간성 그리고 여백의 문제와 이미지와 평면구조의 독특한 공존양상에서 그런 가능성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이 선생님의 제작의도를 이해하는 일에 무리가 없다고 보십니까?


이동엽: 물론입니다. 현대성의 영향관계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저는 제 화면을 직관적 공간이라 주장했습니다.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오상길: 또 이러한 양상이 빚어진 그 배후에 우리가 짚어봐야 할 문제 중의 하나를 저는 일본미술계와의 관계 속에서 찾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 나라의 근대화가 일제 강점기 하에서 왜곡된 과정을 거쳤으므로 그에 영향받은 바가 있고, 해방 이후에도 상당한 정보를 『미술수첩』 같은 매체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본미술로부터의 영향이 얼마간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 1969년부터 시작된 모노하가 서구미술의 추종과 모방이라는 역사적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 미술에 있어서의 일본적 가치를 자각하게 했고, 1975년도 동경화랑에서 열렸던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전 역시 관련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전시는 선생님과 허황 선생님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동엽: 김문호씨가 “당신하고 허황씨 때문에 이 전시가 만들어졌어.” 라고 하더라구요.


오상길: 1975년도면 일본은 모노하를 거치면서 미술에 있어서 일본적 가치에 상당히 눈을 떠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야마모토 사장이 선생님과 허황선생님 작품의 흰색을 통해 한국적 특성을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전시를 통해 일본에서 독특한 백색이 한국작가들의 상대적인 특성으로 어필했던 것 같습니다만, 이런 관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동엽: 예, 야마모토 사장은 국제적인 화상이기 때문에 서구와는 다른 그러한 가능성도 봤을 겁니다.


오상길: 상대가 일본 사람이었다는 것에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일본은 우리 나라와 비교해서 많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특성을 더 잘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좀더 정리가 되어있는 일본화단에 한국작가들의 독특한 면모가 소개되었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이동엽: 나중에 안 얘기지만 이브 클랭의 초기 청색 모노크롬 전시를 동경화랑에서 했었어요. 동경화랑은 이미 이브 클랭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데뷔시켰다고도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 이브 클랭은 지역적으로 일본과 연관이 있기는 해요. 부모님이 일본에 거주했던 시기가 있어서 일본생활을 경험했고, 유도 유단자이기도 해서 아마 활공하는 작업이 낙법을 믿고 한 행위작업이었다고 해요. 이미 동경화랑은 세계 각처에서 누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이브 클랭이 일본의 청색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고, 이브 클랭은 니스해변을 바라보고 티 한 점 없는 창공을 내 세계로 한다는 자연에 대한 선언이 있었어요. 야마모토나 나카하라는 이미 유럽의 모노크롬을 다 파악한 상태에서 다른 눈으로 또 보려는 노력을 한 것 같습니다.


오상길: 문제는 《한국․5인의 작가 다섯가지 흰색》전 이후에 한국작가들의 일본전시가 활발해지면서 많은 한국 작가들이 백색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집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누가 먼저 백색을 써서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는데 따라했다라는 식의 유치한 단계에서가 아니라, 꼬집어 말하자면 일본인의 취향에 맞추어진 그림이 앞다투어 제작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유행처럼 번져 집단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일본사람의 취향이나 판단에 의해 발견된 특성과 한국작가들의 자발적인 발상에 의해 구축된 미학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고, 이 점을 네가티브한 시각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소수 일본미술인들의 관점과 취향을 자발적으로 극대화하여 반영한 결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일본에서 호평을 받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었겠지만, 그것으로 일부 작가들이 한국화단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것이 집단화의 배경이 되었다면 이러한 현상은 가히 기형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야마모토나 여러 미술인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인들의 취향을 한국미술에 집단적으로 반영시킴으로서 문화정치학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개별적으로는 외국에 진출하는 기회의 문제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집단적으로 나타남으로써 한 시대를 획일화하며 특징짓는다면, 비록 문화정치학적인 의도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백색은 일제에 의한 강점기에 야나기 무네요시가 구축한 일종의 식민미학으로서 백색 개념과 연관을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만, 미네무라 도시아키가 어느 한국작가의 작품을 “모노화의 일환”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거나, 치바 시게오가 한국현대미술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방법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한 점들도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집단화는 함께 큰 목소리를 내면서 강해질 수 있었겠지만 그만큼 그 집단에 속하지 않은 소수의 가치는 무시되었을 것이고, 상당부분 사람들이 집단화에 휘말림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독자적인 세계를 지속적으로 심화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떠 안았습니다. 때문에 저는 단색조의 집단화 문제가 개체적인 감성과 취향, 철학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가는 일에 상당부분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위 강령처럼 떠받들고 집단화, 획일화되어 갔던 당시의 상황들은 이제 와서 그들 스스로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상황을 직접 경험하셨을텐데 이런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동엽: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때는 현실적으로 일본이 국제무대 진출을 위한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보는 긍정적인 관점에 대해 우리는 쉽게 얘기해서 구미에 당겼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박한 색채나 자연관 뭐 이런 것에서 마치 우리의 국적을 찾은 것 같은 확신이 있었어요. 그것이 착각일지는 몰라도 말이죠. 체질적으로 선호되지 않았나? 그렇게 상호작용을 했어야하지만 국내화단은 다층화가 되지 않아 그저 하나의 출구 같은 역할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권력화, 집단화되고… 개인적으로 문제가 심각하다고 당시에도 생각했습니다. 가능성 있는 몇도 있겠지만 대다수가 피해를 보게되니 다양성의 구현이 제대로 될 수가 없겠죠. 


오상길: 이런 집단화가 종국에는 수직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패권주의 양상을 띄었습니다. 이런 화단의 질서 역시 당시에는 주류들을 강하게 해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들도 역사 속에서 대응적으로 생존해야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비판적인 해석과 담론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대안적인 성격을 스스로 부재하게 만든다거나, 한 시대 미술문화를 단순화시키고 담론을 빈약하게 함으로 인해 스스로가 역사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화단에서는 주도권을 둘러싼 불신과 반목이라는 전근대적이고 반문화적인 풍토를 조장함으로써 윤리적으로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 동안 우리 미술계가 70년대를 보는 네가티브한 시각이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70년대 미술에 대한 평가에 인색한 것 같습니다만….


이동엽: 창작이라는 것이 선택되어지는 그런 아이러니가 있죠.


오상길: 사실 제 생각에도 집단의 논리 속에서 개체의 미학과 발언들이 고스란히 함몰되어 서로간의 차별화에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70년대 작가는 70년대라는 집단의 윤리 강령 속에서 해석될 뿐이지 그 안에서 갖는 각자의 세계, 미학의 차이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거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권력은 쥐었지만, 역사적으로는 상당부분에서 실패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동엽: 그래요. 큰 손실이 있다고 봐요.


오상길: 따라서 저는 더 이상 70년대를 집단 미학의 테두리에 머물러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부의 개체 미학으로 비평적 논점을 미시화해 가는 과제가 남겨져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70년대 미술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0년대 당시의 권력구도를 토대로 한 평가에서 벗어나 개인들의 세계관, 방법론, 감수성을 토대로 밝혀 들어가야 할 비평적 과제가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비록 70년대 작가들이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변태하면서 새롭게 나아가야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이들에게 비평적인 재해석과 담론의 활성화가 절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현재까지의 우리 미술의 제도와 비평적인 양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 우리 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이동엽: 창작이라는 것이 일종의 저항의 정신인데 그게 부족했어요. 획일화되었던 것이 손쉬웠다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 이유는 말씀하신 것처럼 시대의 대응논리로서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모더니스트로서의 자의식에 급급한 나머지 서구 환원주의에 편승하면 손쉬웠지 않았나 하는 거죠. 말하자면 평면성을 하면 모더니스트가 되고 마치 자격증이 부여되는…. 그런 미학적 관점에서 벗어나면 덜 모더니스트로 비평되고…, 비평에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오상길: (웃음)… 굉장히 명쾌하고 예리한 말씀이십니다.


이동엽: 좀 애들 같은 생각이지만 나도 그런 오해 속에 살아온 것 같아요. 소위 덜 모더니스트다라는… 완전히 납작해지지 않았다라는…(웃음)… 대학시절 어느 교수를 통해 언뜻 들은 얘기가 있는데, 지금 미국에서는 색채평면추상이 유행이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반발했어요. 제 개인적이고, 독단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이미 끝났어? 아냐! 우리 그림은 현대회화로서 제대로 그려져 본 적이 없는데?’ 라고 생각했어요. 뒤늦더라도 가장 고전적인 평면에 고전적인 붓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직도 그려? 아직 원근감이 있어?”라고 이야기들 하는데 난 원래 원근법이 아니고 농담濃淡이거든요. 그러면서 컵 시리즈를 하면서도 자문자답을 했어요. ‘전통 동양화도 아니지만 서양화도 아닌데?’, ‘오히려 동양화가들은 내 그림을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이해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누군가는 공모전에서 너를 지지하더라 하기에 보니 그게 동양화를 하시던 분이었어요. 참 반가웠죠. 화선지의 세계는 대단한 겁니다. 서양화는 평면이라는 것이 그림을 그릴 밑바탕밖에는 안되죠. 하지만 동양화는 아예 소재(화면)자체가 세계로서 전제되어있는 원초적인 공간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태초, 근원 그런 말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평면을 하면 모더니스트가 된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제 화실을 방문한 테이트 갤러리의 루이스 빅에게 나는 서구 모더니즘의 계율에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지요.


오상길: 예. 오늘 긴 시간동안 대담에 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III-Vol. 1(ICAS, 2003)에서 발췌

출처: http://cafe.naver.com/haeto/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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