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익영 <김홍도와 한국 현대회화 - 여백의 미, 해학성의 맥락>

Critique 평론 2003. 1. 21. 00:56
김홍도와 한국 현대회화
- 여백 미, 해학성의 맥락 -
            
윤익영(미술평론)


부분인용: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화선지는 그 자체가 본래 구름으로 차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 속에 가려진 산과 초목을 하나씩 드러내는 것이 산수화인 것이다. 다시 말해 구름과 산천이 접촉하는 경계 부분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다. 구름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히려 산이 그려지고, 따라서 붓이 지나가지 않고 남아있는 모든 여백은 사실상 구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산수화의 여백은 구름의 초상화이다.

북송 시대의 곽희(郭凞)는 그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구름 없는 산은 화초가 없는 봄과 같다”고 하여 구름과 산의 절실한 교우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구름은 하늘이 아니라 산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필자는 산수화의 이 여백을 구름이 통과하고, 구름의 삶이 있는, ‘구름 길’ 이라고 했다.

2.3. 여백은 청자, 백자와 상통

이와 같은 ‘구름 길’의 전통적 맥락은 한국 추상미술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가장 좋은 예를 단색조의 파란색으로 덮인 심환기의 「공기와 소리(I)」(1973)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그림에서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화폭을 가로지르는 가늘고 긴 공백의 수평선이다. 이 빈자리가 바로 구름이 지나가는 ‘구름 길’이며 화폭에 생기를 패우는 기맥(氣脈)과도 같은 것이다.

흰 선의 위 부분은 하늘이고 아랫부분은 바다일 것이다. 자세히 관찰하면 화폭을 가득 채운 푸른 점박이 얼룩들은 하늘과 바다를 연상하도록 일정한 방향을 갖고 운동한다. 하늘의 점들은 원을 그리고 바다의 점들은 수평 운동을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서의 하얀 여백의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의 사이이며, 그 빈자리는 대기가 지나갈 공간인 것이다. 아니면,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소리’가 지나갈 통로일 것이다.

1970년대 이래, 이러한 예는 윤형근의 「茶靑」연작들, 이우환의 「점에서」와「선에서」연작들, 이동엽의 「상황」과 「間一冥想(循環)」연작들에서도 볼 수 있다. 「間一冥想(循環)」(1992)에서 보듯이, 화폭의 여백 속으로 점점 스며들어가는 짙은 선들은 마치 계곡이나 절벽들을 연상시켜 주는데, 그 두 수직축과 수평축의 사이가 ‘구름 길’이다. 질릴 정도로 팽배한 화면은 절묘하게 山↔水의 교체를 중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음양의 충화(沖和)로 가득 찬 대기의 긴장이 있고, 그 사이의 틈새는 양극의 에너지를 융화시켜주는 호흡의, 명상의, 구름의, 메아리의 계곡과도 같다. 산수화에 담긴 전통적 여백의 정서가 이어진 조형기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모든 조형 형태 속에는 과거로부터 대물림을 해왔던 ‘잠재적 조형 요소’가 숨겨져 있기 때문인데, 언제라도 다시 드러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유전형질(遺傳形質)의 핵을 나는 근래에 ‘조형적 DNA’라고 말해왔다.
김환기의 추상 작품을 관통하는, 그러니까 ‘하얀 여백의 수평선’에 관한 담론에서 이 그림의 조형적 유전인자가 고려청자와 운학(雲鶴), 조선의 백자에서 유래됐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수평선의 유전형질을 분석한다.

고려 청자의 푸른색이 하늘이었다면 거기에 새겨진 백색의 운학은 구름이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인 것이다. 파란색과 흰색은 결핍의 기표이고 하늘과 구름은 기의가 되는 것을 안다.기의는 은유와 환유로 되어있으므로 결핍의 은유이고 구름은 결핍의 환유이다. 따라서 고려 청자나 조선의 백자는 하나같이 ‘결핍’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곳에 언제나 물을 채우지만 언제나 비워진다.) 그것의 무의식은 요구이다.

그 결핍이 겉으로 드러나면 욕망(하늘, 구름, 학)으로 보이는 것이고, 그 욕망을 은폐시키기 위해 백색으로 억압한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기호인 구름과 학은 조선시대의 선비를 상징했다. 우리말 사전에 ‘고운 야학(孤雲野鶴)’이라는 한자 성어가 있는데, 그 뜻을 풀이하면 ‘외따로이 떠 있는 조각 구름과 들에 깃들이는 두루미’라는 의미로 ‘벼슬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숨어사는 선비’를 비유한 것이다.
    
이 말이 언제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구름과 학은 모두 선비를 상징했던 것만은 틀림없으니, 적어도 조선시대의 수묵 산수화에 그려진 선비들은 구름과 학으로 비유할 만 하다. 단원의 「해산선학(海山仙鶴)」과「심계선학(深溪仙鶴)」을 보면 학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운상신선(雲上新仙)」을 보면 구름은 신선(神仙)이 지나가는 ‘신선 길’로 표현된다.
    
선비는 벼슬의 욕망을 ‘억압’하고 한가로이 숨어사는 ‘은폐’자 이다. 여기서 ‘은폐와 억압’은 백색의 거세로, ‘한가로운’ 모습은 백색의 여백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 백색의 이면에는 선비의 욕망(무의식)이 가려져 있는데, 소유하고 싶은 것이 지나치게 많아서 아예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할 때처럼, 너무 많은 욕망이 억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백색에는 표현하지 않은 욕망들로 가득하다. 학에 숨겼던 욕망을 다시 구름 속으로 옮겼다가, 더욱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백색의 여백으로 위장한 것이다. 사실 그 백색의 공간에서 더 많은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색 공간의 탄생에 기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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