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랑 헤기 <이동엽의 회화적 메타포>

Critique 평론 2008. 4. 29. 11:24
이동엽의 회화적인 메타포
회화의 힘을 보여주는 들판

로랑 헤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 결정적인 변형의 장소, 원초적인 의미가 전이되는 장소, 기존의 상태가 현존하지 않는 다른 상태로 변하는 장소, 즉 생성 과정이든 지각 과정이든 변형 과정이 일어나는 장소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동엽 예술의 핵심적 요소처럼 보인다. 순수하고 정연하고 투명하고, 지극히 상호관련적인 그의 회화에서 '장소'라는 개념은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미적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 의미를 토대로 이동엽은 인지체계로서, 혹은 생성 과정과 창조 과정에 대한 감정이입적 창조적 참여로서 예술이 있는 장소의 문제를 회화적으로 치열하게 천착한다.

그런데 작가의 예민하고 불가사의한 아우라를 좀 더 적절하고 함축적인 느낌으로, 그리고 좀 더 복합적이면서 동시에 시적이고 자유롭게 포착하기 위해서는 '장소'라는 말 대신 영역, 지대, 지역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장소라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너무 지리적이고 실제적인 느낌이 들 뿐만 아니라 측정 가능하고 제한적이며 일차원적이고, 그래서 덜 은유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영역'이라는 개념은 그 경계를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넓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공간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지대'라는 개념은 특별하고 독특하고 특수한 실재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단순히 거기에 존재할 뿐인 실재이자, 다른 분야와 구분되는 신비적인 지대 속에서만 인지되고 인식될 수 있는 실재를 가리킨다. 지대란 특별한 속성을 지닌 특별한 지역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독특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특별한 지역이자, 특수한 합법칙성과 환경이 상황을 결정짓는 특별한 지역이다.

이동엽은 자신의 회화에서 이러한 특수한 영역의 비밀을 추적하고, 그 고유한 특성을 이해해서 전달하며, 그 영역에서 일어나는 특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수께끼 같은 변형과 의미의 전환을 시각화하려고 노력한다. 그가 만들어낸 이 영역에서는 폭넓고 방대한 문맥을 암시하는 모종의 구조가 반짝거린다. 이것은 이 영역의 특수한 시각적 형태화, 그리고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고 실존하지 않는 거대한 구조 사이의 연결을 연상시키는 구조이기도 하다. 관찰자가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시각적으로 직접 인지할 수 없는 것, 이지적인 것, 무언가 더 넓은 것을 암시할 뿐 아니라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른 폭넓은 영역을 지닌, 현실보다 더 높고 더 넓은 구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직접 드러나고, 시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화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특수한 영역들은 시각적으로 직접 인지된 현상들을 직접 인지될 수 없는, 단지 암시만 가능한 고도의 포괄적인 다른 구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이런 특수한 영역 속에서만, 또 이 영역이 지닌 급진적 특성의 연상과 시적인 효과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구조이다. 이 영역의 특수한 능력, 달리 표현해서 이 영역의 시적인 기능성, 상상적인 작용, 연상적인 투사 능력과 감응 능력은 공간과 시스템 사이를 매개하고, 그 연결을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명쾌하고 선명해진다. 이동엽은 자신의 회화에서 시각적 체계들의 이런 연상적 능력을 선보인다. 이 능력은 한편으론 기능성과 시적인 효과, 특수 영역의 연상적이고 불가사의한 암시 능력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론 시각적 구조들의 인지 내에서 근본적인 변형에 대한 가치 평가의 문제와 치열하게 대면한다. 이런 가치 평가는 시각화로, 그리고 기존 구조의 시적 매개체로 시각적 형상화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때 회화는 이미 존재하는 심층구조들을 효과적으로 연상시키는 계시나 관여의 수단으로 인지된다. 관여의 수단으로서 회화는 새로운 환경과 구조를 생성하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도구로 기능하고, 그 자체로 새롭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상황들을 자극할 뿐 아니라 공동으로 형상화한다.

이 두 번째 가능성은 회화 외부에서 기능하고, 인간의 참여와 급진적 판타지를 통해 전개되는 폭넓은 정신적 공동체를 창조하는 회화의 불가사의한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또 이것은 이 과정에서 창조적이고 고무적인 힘으로 함께 작용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시각적 요소들을 감정이입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구축하는 것은 관찰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고, 상이한 경험과 감정 사이의 새로운 연결을 창출한다. 이러한 새로운 연결의 창출은 은유적 메시지와 미세공동체적 이야기 구조를 통해 회화의 시각적 구조를 풍성하게 한다. 이런 은유적 메시지와 미세공동체적 이야기 구조는 회화 체계 하나하나의 고유한 특성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특색과 다양한 형태 속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회화 체계 각각의 이러한 급진적 고유성 속에서 정신적 감성적 특징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이렇게 형성된 결정체는 새로운 연결을 통해 활성화되면서 각각의 회화 체계 속에서 새롭게 평가되고 투입된다. 따라서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보편타당한 회화적 원칙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각각의 상이하고 구체적인 회회 체계 속에 드러난 고유한 특성만 존재할 뿐이다. 이 특성은 불가피하게 미세공동체적 문맥에 편입되고, 이러한 편입은 시각적 형상의 급진적 구체화와 상이한 정신적 영역 사이의 불가피하고 밀접한 연결을 통해 확인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이 고유한 특성의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급진적인 구체화가 항상 상이한 개별적인 경험과 감정, 방향성의 창조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이로써 시간 감각, 공간 감각, 자연 체험, 감성적 방향, 문화적으로 습득된 가치들의 개인적인 내면화, 미세공동체적 기호 체계, 상징, 신호, 언어 구조와 인습 등과 같은 민감한 영역들이 회화적 형상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된 정신적 공동체에 편입된다.

주로 흰색이나 연회색 색조가 사용되는 이동엽의 회화에서 수직선이나 수평선은 그림의 표면 한쪽 가장자리에서 다른 쪽 가장자리로 죽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의 특수한 영역 위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이 영역을 떠나 다시 사라지면서 그 시각적 존재감이 완전히 상실된다. 이 선들은 형체와 몸, 덩어리를 나타내는 윤곽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명확한 기하학적 형태도 아니다. 오히려 처음엔 거의 설명할 수 없고 근거 없이 존재하는 것 같은 모종의 불가사의한 분리선에 가까워 보인다. 즉 설명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구분되어 있는 미지의 유연한 지내들을 분리하는 선들인 것이다. 이 지대들에 내재된 각각의 특수한 상이성은 이 그림 체계 내에서만, 그리고 구체화한 고유한 특성 속에서만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회화 체계들의 내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와 구도를 통해, 그리고 체계 내부의 상호관련성을 통해 형성된 이러한 내재적이고 구체적이며 시각적인 합법성이 이 체계들에 자율성과 자유, 자기규정, 자기 형상화의 아우라를 부여한다. 물론 그 합법성이란 결코 상위 체계 밖에서는 통용되지 못하고, 수용자의 지각과 해석 과정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분리선들을 은유적 재현, 비유적 상호관련성, 낭만적이고 범신론적인 자연 해석의 문맥 속에서 해석하느냐, 아니면 상이한 지대와 영역의 기능적 개념 규정의 문맥 속에서 해석하느냐는 관찰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첫 번째 해석은 상징적으로 표현된 풍경화 분야의 함축적 의미로 시작한다. 여기서 풍경은 많은 내레이션을 전달하는 감정이입된 아름다움으로 묘사된다. 공간 감각, 자연 체험, 개인적 기억과 미세공동체적 인습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때 이런 복잡하고 개방적인 '함축성 아우라'는 순수하고 투명한 그림 구조 내에서 특수하고 구체적이고 일회적인 고유 특성을 통해 생성되고 기능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선들은 분할로서 인지되고, 그림 영역은 비유적 준(준)풍경으로 인식된다. 또 수수께끼 같은 형상과 진지하고 고요하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건들이 묘사된다. 바로 이런 자잘한 회화적 사건, 형상화의 뉘앙스, 그리고 몇몇 하얀 색조들 사이의 작고 섬세하고 거의 드러나지 않는 차이들이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상의 세계는 함축적 관계의 은유적 확산을 활성화하고, 그로써 상이한 정신적 영역들을 새로 탄생한 개방적이고 유연하고 유동적인 상황으로 끌어들인다.

이동엽은 다양한 계절에 빛을 통해 미묘하게 변하는 색채들을 자주 언급한다. 또 그림 속의 어떤 지대들을 비밀스럽게 나누고 있는 분리선과 공간 감각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한다. 외부의 영향, 풍경과 빛의 인상, 색채, 움직임, 감성적 분위기, 기억, 연상, 체험의 인상은 개별 그림의 구체적인 특성 속에서 항상 다른 식으로 창조되고 내면화된다. 이때 밝고 투명하고 포착이 거의 불가능한 형태화가, 항상 무언가 존재하지 않는 것, 상상의 것, 시각적으로 직접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시적인 암시 작용을 부각시킨다. 존재하지 않는 것, 포착할 수 없는 것, 있을 법한 좀 더 넓은 구조들에 대한 이런 암시가 알레고리로서 혹은 개인적 상상적 투영으로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상이한 정신적 영역들 사이의 창의적 연상적 연결을 위해 관찰자가 방향 정립하는 것을 돕고, 그 길을 동행하고, 불가사의하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로 사용 가능한 계시를 제공하는 길의 표지판처럼 말이다. 이러한 동행, 이러한 감정적 참여의 형태가 이동엽의 전 작품에 낭만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넓고 하얀 그림 공간, 혹은 오로지 하얀 색조의 뉘앙스로만 구축된 그림 속에 이따금 등장하는 분할선들은 불가피한 상황들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관찰자가 직접 관계해야 하는 객관적이고 시각적인 사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인식과 결정이다. 이 두 과정은 적극적인 지각 활동의 참여를 유도한다. 이동엽의 그림은 열려 있는 새로운 상황을 창조해낸다. 이 상황 속에서 과찰자는 시각적 형상화의 뉘앙스를 그림 체계의 특성과 관련해서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고, 내재적 변화와 변형에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놀랄 만큼 섬세하고 다양하고 세분화된 이러한 시각적 구조를 풍요롭고 유연하고 무한하고 예민하고 개방적인 메타포로 내면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내면화 과정에서는 - 개인적인 특수한 경험을 열린 상황과 직접 연결시킴으로서 회화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 단지 시각적 형상화의 요소들만 끊임없이 새로 평가되고 재해석되고 가능한 영역으로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리는 상태, 즉 걷잡을 수 없이 유동적이고 개방적이고 무제한적인 은유 형상도 회화적 형상화의 중심으로 옮겨온다. 따라서 나는 복합적인 작업 과정으로서 회화적 형상화의 의미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구체적인 결과와 특수 상황은 구체적인 작업 과정과 평가 과정, 결정 과정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난다.

개인 차원에서 진행되는 항상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경험과 연관되는, 늘 개별적인 그림 체계의 특성 속에서 전개되는 실제적이고 일회적인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과찰자가 새롭게 복잡하고 개방적인 상황에 효과적으로 연결되어 생명을 불어넣는 인지와 창조에 적극 가담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동엽의 고요하고 명상적인 회화는 최소한의 뉘앙스로 환원되면서도 놀랄 정도로 섬세하게 색조를 세분하고, 감성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관찰자를 내밀하게 동행하도록 만드는 지울 수 없고 효과적이고 풍부한 시적인 가능성의 메타포를 제공한다. 이런 시적인 가능성은 그림 체계의 고유한 특성을 구체화함으로써 실존하는 형태와 정신적인 영역을 생동감 넘치게 연계해 회화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그의 고요함, 그의 평온, 그의 힘, 그의 참여는 그의 그림에 깃들여 있는 소박함과 우아함을 통해 극병하게 표출된다. 그의 그림에는 군더더기처럼 부가적이고 자의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동엽의 그림은 눈 덮인 하얗고 넓은 들판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할 뿐이다. 어서 이리 와서 눈밭을 거닐라고, 눈 내리는 하얀 숱으로 들어가 자연과 하나가 되라고 손짓하는 들판처럼.


번역: 박종대



로랑 헤기
미술 사학자이자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현재 프랑스 생테티엔느 미술관장으로 있다.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오스트리아 빈의 루드비히 미술관장을 역임했으며, "슈투트가르트 조각 비엔날레" (1995년), "La Case, il Cuore - 정체성의 건설" (1999년), "발렌시아 비엔날레" (2003년), "마이크로 내러티브: 작은 현실의 유혹" (2007년) 등 다수의 주요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New Sensibility - Change of Paradigm in Contemporary Art] (1983년), [Avant-garde and Transavantgarde] (1986년), [Experience and Fiction] (1991년), [The Courage to Be Alone]  (2004년) 등이 있다.



ref.    2008년 4월 30일 - 5월 21일 학고재 <이동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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