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홍 <이동엽 읽기>

Critique 평론 2003. 6. 7. 01:48
이동엽 읽기

엄기홍 (청주대학교 미술학부 교수/화가)



1. 진정성

예술가의 천재성,
작품의 고고한 순수성,
작품의 자체 충족적인 세계구성,
천박한 부르주아 취미에 대한 반동,
엘리트적 고급예술.

미술사에 기록된 서구모더니즘미술의 특징들이다. 모더니트스들은 순수한 미적가치를 추구하는 자 즉, 모더니즘 특유의 미적정서를 환기하고자하는 자들이다.

1972년 이 땅에서 처음 앙데팡당이 개최되었다. 앙데팡당은 예술가 특유의 능력과 개인주의적인 기질을 유도하기 위하여 기획된 이름 그대로 독립전이다. 관습이나 관행, 학연으로부터의 자유다. 이 특별한 전시회에 출품된 이동엽의 <상황>은 1석을 차지한다. 전시의 목적이 컨테스트는 아니지만 당시 재일 미술평론가이자 화가인 이우환이 단독 심사한 결과다. 그의 <상황> 즉 유리컵은 바로 한국모더니즘회화의 정수에 다름 아니라고 할만하다. 컵의 이미지와 붓질의 팽팽한 대결 뒤에 나타난 투명성과 긴장감, 형태심리학적인 극단적 단순성과 심미성, 비구성적 대칭성, 화면전체를 감싸는 쿨한, 그러나 우리의 감성적인 생명과 공명하는 형태와 리듬. 약관 25세의 그의 회화는 형식주의 미학의 표상으로서 당대 엘리트미술을 대변한다. 진정성(authenticity)이란 개념을 회화에 적용한다면 그의 회화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 모더니스트다. 하나만 더 기록하자. 그러나 동시에 그는 회화적 진정성에 대하여 정반대 방향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차라리 역설적으로 수행성(performativity)의 작가라고 불려야 마땅할 지도 모른다.


2. 수행성

현대미술은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양식이 해체되고 추상미술이 극한까지 나아갈 때 오브제화 된다. 즉 모더니즘미술의 전성기 국면쯤 되는 미국의 1960년대의 리터럴리스트 아트가 그렇다. 리터럴리스트 아트 즉 오브제가 된 즉물성의 미술에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논리', 혹은 아이디어만이 중요시된다. 도널드 저드는 자신의 오브제를 그래서 '특수한 오브제(specific object)'라고 불렀다. 예술작품이란 그냥 물건이 아니라 언어처럼 일종의 의미의 담지자라는 관념론적인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의미리라.

이동엽의 유리컵도 이 지점을 피해가기 어렵다. 그것이 컵의 재현이 아니라면 재현을 넘어선 모든 예술행위는 재현언어에 대한 일종의 메타언어로서 작가논리에 근거한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르셀 뒤샹 이후의 미술은 근본적으로 개념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때 작가의 수행이나 예술품은 자체-지칭적이기보다는 작가가 제시하는 논리나 아이디어의 증거물 혹은 의미의 담지물로서 소위 말하는 '알레고리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70년대 초 이 땅에 상륙한 개념미술적 성향을 보인 거개의 수행성의 미술도 그랬다. 그만큼 작품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작품의 컨셉 즉 논리가 수행성에 우선한다. 그러나 이동엽은 그 무렵 이 땅에 상륙한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이나 개념미술의 교조적인 '논리'를 가로질러 '몸'으로 일구는 '수행'을 자신의 회화에서 현상학적으로 기술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서양도 동양도 아닌, 그러나 거꾸로 서양이면서 동양인 우리의 몸과 기호의 영역을 찾아"가는 도정으로 볼 수 있다면 그는 그 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탁월한 예술적 변용을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의 그림의 기표이미지에서 수행의 흔적을 찾기란 거의 불가하다. 또한 수행이란 공간보다는 시간과 몸이 우선되고 논리에 대하여 비합리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현전효과가 투명하게 드러나는 이동엽의 작품을 수행성으로 읽기란 일견 모순돼 보인다.

작품에서 확인하자.
사진에 나타난 작품을 보면 유리컵은 하드엣지 구조로 '그림'이 명료하다. 윤곽이 마스킹테이프를 이용하여 그려진 듯 곧을 뿐 아니라 작가의식의 투명성을 드러내는 컵의 해조적 톤도 또한 기계적이리 만큼 명료하다. 따라서 조형적 관점에서 보면 그리는 행위 곧 '그리기'라고 부를 수 있는 수행 과정은 대상화되지 않았다. 투명한 만큼 논리적으로 보일망정 몸과 마음과 물질을 이어주는 붓질이 표상적으로 드러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수작업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작업은 그냥 손으로 그렸다. 컵은 붓질을 수없이 반복하는 가운데 남겨진 '상황적' 수행의 흔적물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의 작업에서 몸의 수행성이 얼마나 큰 몫을 하는지 살피는 일이다. 초기의 그의 그림이 유리컵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도상적인 형상을 갖는 것도 그 몸의 수행 정도를 컵이라고 하는 대상을 통하여 확인하고다하는 욕망으로 보인다. 이점은 80년대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이>연작에서 보다 분명하다. 여기서 컵의 도상은 사라지고 컵을 그리던 붓질의 일부라고 부를 수 있는 붓질의 '이미지'만 남는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자족성이 없다. 그것은 얼마만큼 작가가 덧없는 붓질을 반복했는지 추론하게 하는 단서 즉, 일종의 지표(index)다. 이동엽의 수행성 혹은 내공(內攻)의 이미지다.

그것을 로고스 중심주의를 탈피하고자하는 소위 전세기 말의 화두이기도 했던 '몸'의 부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수행성의 터전인 몸이야 말로 모더니즘미술에 나타난 논리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새로운 코드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몸은 이원론적 억압이나 차별을 해지하는 해체담론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그의 화면에서 우리가 '본 것'은 심플하고 쿨한 기하학주의나 환원주의적 경향과 가깝지만 '보여진 것'은 대상과 주관이 하나가 되는 수행성의 장으로서 일종의 키아즘(chiasm)이다. 위상학적 역설이다.


3. 반복

그의 작품의 외연은 일견 여느 작가에 비하여 별반 변화가 없다. 작업광경도 수행성 작가라고 부르기엔 단조롭다. 얼핏 보아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더구나 그리기 외에는 다른 생계수단도, 그 흔한 대학강의도 없는 그에게 반복은 일종의 업보처럼 보인다.

사실 반복(repetition)이란 미술행위에서는 원본성(originality)의 반대개념이다. 모더니스트미술가들이 추구한 것은 원본성이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 비평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역설적으로 원본성 없는 반복 속에서 후기현대미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로고스중심주의 산물인 재현체계의 붕괴 후 반복은 차이(difference)와 함께 탈모던의 키워드가 되었다. 어쨌든 반복과 차이는 한패로서 작동되는데 특히 반복과 같은 용어는 시간성을 담지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정의되지 않는다. 철학자 질 들뢰즈에 따르면 구조주의관점에서 볼 때 반복은 일반성(generality)이란 개념과 대조가 된다고 한다. 들뢰즈의 견해에서 반복이 중요한 것은 반복과정에서 나타나는 사건 즉 물질의 표면효과를 계열화시키면 그것이 곧 개별 사건들을 특이성(singularity)으로 치환시키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동엽 회화의 특이성 또한 반복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복은 우연이나 찰나의 존재론이며 예술적 리얼리티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반복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등가물을 가질 수 없는 특이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태도라고 적극적으로 정의해보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반복과 함께 차이의 개념도 그에게 중요하다. 차이란 그의 화면에서 컵의 도상성(iconicity)이 사라진 이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대상에 대한 '닮음'이 붕괴되면서 붓질사이의 '다름'이 더 시선을 끈다. 그것은 바로 스타일의 문제이다. 붓질의 반복 가운데 나타나는 차이에 주목하면서 그만의 스타일만이 화면에 남기 때문이다. 스타일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용이나 의미도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일종의 카이즘 가운데 작동되는 사이-존재(inter-being)와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최근작이 무상, 명상으로 명명된 것도 그의 '깨어있음(mindfullness)'에 대한 수행성 즉 반복과 차이에 관한 그의 감수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 까닭에 그의 스타일적 사고는 의외로 '새로운 감성'을 요구하는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과 '이웃관계'로일 수도 있다고 본다.


4. 무의 장관

"어! 그림이 없잖아?" 관람객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그의 그림은 보는 사람들을 일견 무시하는 듯하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가 일종의 선문답이다. 그렇다. 이동엽의 작품에서 그림이 있다고 자각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고 없다고 자각하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옅은 잿빛 화면에서 색깔이 있다고 자각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고 없다고 자각하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바로 존재와 부재의 이 이중성에 대하여 부단하게 보는 이에게 말을 거는 데 있다. 이런 선문답은 우리를 단순한 관람객(observer)의 지위로부터 참여자(participator)의 입장으로 전환시킨다. 큰 미덕이다.

메를로-퐁티가 <눈과 마음> (L’Œil et l’esprit (Paris: Gallimard, 1964))에서 세잔느 회화에 대하여 사용했던 '무의 장관(spectacle of nothing)'이란 용어를 상기하자. 좋은 회화란 그냥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메를로-퐁티의 지적대로 시각이란 나 자신으로부터 부재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수단이라는 점을 깨달을 때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운데 현상되는 환상이 아니던가? 그것은 곧 이동엽 회화가 던져주는 매력이다. 곧 그의 선적(禪的) 회화 즉 무의 장관이다.



ref. 2003년 서울 카이스갤러리 이동엽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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