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 <존재 속에 깃든 힘의 운동>

Critique 평론 1983. 3. 16. 22:45
存在(존재) 속에 깃든 힘의 運動(운동)

조정권



李東熀(이동엽)은 지난 70년대 초중반부터 繪畵(회화)의 平面性(평면성)에 대해 方法論的(방법론적)인 자각을 지니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시해 온 작가이다. 그의 繪畵(회화)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무수한 붓질이 반복된 결과로서 생성된 畵面(화면)의 바탕 그 자체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畵面(화면) 위에 무엇을 그려 넣거나 나타내 보이겠다는 종래의 '그린다'는 기본적 방식을 벗어나 있으며, 말하자면 자신의 繪畵(회화)의 發生(발생)을 종래의 '무엇을 그린다'는 어떤 목적성을 거부하는 곳에서부터 출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캔버스 위를 마치 빗자루질로 정교하게 닦아 나가듯이 흰색으로 일정하게 붓질을 반복해 가는 그의 작업은 결국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투명한 존재영역 속으로 도달하고 환원하려는 그의 기본적인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캔버스 위를 흰색으로 무수히 붓질해 나가는 그의 繪畵(회화)가 그 결과 도달하는 곳은 역시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투명성'에 있다. 그것은 물론 마음으로 心得(심득)되는 境地(경지)이지만, 畵面(화면)과 작가 사이에 되도록이면 거리를 제거하고 어떤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畵面(화면) 그 자체 속에 들어가 잠겨 있는 밀착의 상태이다. 畵面(화면)과 자신과의 거리를 제거코자 하는 그의 이 같은 行爲(행위)의 等式(등식), 또는 정신의 양식은 일견 書道(서도)정신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李東熀(이동엽)에 있어 '붓질'이란 단순한 표현수단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존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붓질은 書道(서도)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의 붓질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畵面(화면)이라고 하는 근본 바탕에 대한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물음에 있기 때문이다.

畵面(화면)을 마주하는 그의 接近方式(접근방식)은 '바라보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며 그는 그 속에 더욱 단단히 자신의 존재를 새겨 넣고 있다. 그의 붓질은 이미 무엇을 그리겠다는 사전의 목적성을 애초부터 거부하고 있고, 그야말로 無作爲(무작위)의 반복이요, 반복함으로써 텅 비어 가는 존재에의 開花(개화)에 다가가 있다.

그의 繪畵(회화)는 붓질(行爲)의 무수한 중첩 내지 반복의 결과로서 畵面(화면)의 바탕으로부터 마치 울어나온 듯한 形象(형상)이 生成(생성)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부터 그러한 목적을 기대하고 그려진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목적성을 거부하는 행위와, 행위의 무수한 중첩 혹은 사이(間)에서 生成(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畵面(화면)과 자신 사이에 어떠한 공간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實存的(실존적)인 상태에다 스스로를 몰아넣었던 接近方式(접근방식)에서 다소 궤도를 수정하고 있는 것이 요즈음의 이동엽이 하고 있는 水彩(수채)의 세계이다. 그의 水彩(수채)는 畵面(화면)과 자신 사이의 긴장의 끈을 다소 풀고 숨을 터놓으려는 심사의 저의인 듯하다. 그러나 그가 이제까지 그 자신이 제거해 왔던 情意的(정의적)인 거리를 스스로에게 되돌려 주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水彩(수채)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종이 그 자체 속으로 마치 소멸되고 생성되는 線形(선형)들로서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事物(사물)의 現象(현상)과 정신의 現象(현상)을 일치시키려는 그 자신의 철학과 존재의 밑바닥에서 무한히 생성되고 소멸해 가는 힘의 운동을 感得(감득)하게 된다. 李東熀(이동엽)이 이 같은 포오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이제까지의 繪畵(회화)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또 하나의 자기 확산이요, 그의 재능을 믿고 있는 우리로서는 기대해도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ref. 1983년 3월 24일 - 29일 공간미술관 <이동엽 수채전 - 의식의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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