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엽 <나와 현실 사이에 위치하는 의식의 여백>

Philosophy 철학 1983. 3. 16. 15:23
나와 현실 사이에 위치하는 의식의 여백

이동엽 (서양화가)




일반적으로 창작하는 일이란 한 개인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에서부터 하나의 메시지와 미래를 전망하는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다. 현실로부터의 자신의 부단한 상승작용인 것이라 생각한다.

人間(인간)은 그 처해진 오래되고 고유한 지역적 특성과 역사성, 사회적 상황과 그 연속성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작가는 경우에 따라서 특이한 개인이거나 그 개인에 作用(작용)하는 특수상황이 있어서 거기에 相應(상응)하여 반응하는 특수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人間(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모색한다. 자신의 존재라던가, 外部(외부)와의 관계라던가, 아득하게 먼 자신의 出處(출처)를 묻는 것이다.

나는 간혹 어린시절에 들었던 '연어의 일생'을 생각하곤 한다. 연어는 민물의 上流(상류)에서 태어나 下流(하류)로 흘러가면서 바다에서 성장한다. 성숙해진 연어가 배란기를 맞게되면 다시 바다로부터 上流(상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急流(급류)를 타고, 때로는 폭포를 타고 튀어오르며 지금까지 축적된 자신의 기운과 힘을 다 소모하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을 거의 정확하게 찾아가 자신이 태어난 그 장소에서 알을 낳고는 죽어 버린다는 것이다.

연어의 一牲期(일생기)는 나에게 原生(원생)에 대한 回歸性(회귀성)을 느끼게 한다. 연어의 全(전)여행을 통한 軌跡(궤적)의 中心(중심)은 原生(원생)으로 向(향)하는 軸(축)에 있으며 그 軸(축)의 구심점은 原生地(원생지)와의 만남에 있는 것이리라. 全存在(전존재)란 그 軸(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人間(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現存(현존)과 만난다. 그러나 그 現存(현존)은 삶의 한 과정으로서의 現存(현존)이며 또한 그것은 삶의 단면이므로 하나의 連續體(연속체)로서의 顯存(현존)이어야 할 것이다.

生命(생명)이란 태어나서부터 죽음을 向(향)해서 가는 전과정이다. 그러므로 '實在(실재)'라는 개념은 '全存在(전존재)'의 개념으로 色哲(색철)되어야 하며, 참다운 實在(실재)란 삶과 죽음의 전과정을 通(통)해서 만나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現前(현전)은 利那(이나)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佛敎(불교)에서 말하는 無常(무상)이다.

事物(사물)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은 生命體(생명체)이다. 生命(생명)은 삶과 죽음이며, 또한 태어나고 죽어야 하는 全過程(전과정)이 있어야 生命성(생명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무생물이라 할지라도 生成(생성)과 消滅(소멸)의 과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生命體(생명체)인 것이다. 따라서 生命體(생명체)는 生命(생명)이 歷史(역사)를 가져야만 성립된다는 말이다.

人間(인간)을 精神的(정신적) 動物(동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物(물)에도 物(물)의 정신적 현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物(물)의 全過程(전과정) 속에서 그 核心(핵심)은 物(물)의 精神化(정신화)로서의 多行性(다행성)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式物(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씨앗으로부터 싹을 틔우는 과정, 가지와 잎이 생기는 과정, 자라는 과정, 죽음의 과정, 이 네 개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各個(각개)의 과정은 또한 各個(각개)의 精神化(정신화)를 갖는다.

이러한 精神化(정신화)의 全過程(전과정)의 두 개의 中心(중심)은 그것의 絶頂(절정)이다. 그 하나는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 과정이며, 또 다른 하나는 꽃에서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즉 태어나는 과정과 죽음의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의 核心(핵심)은 物(물)의 축적과 凝集(응집)의 구속력으로부터 벗어나 상승하려고 하는 에너지 - 즉 物(물)의 精神化(정신화)이며 自由意志(자유의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실의 구속력으로부터 경직되고 왜곡되어 있는 精神(정신) 상황에 하나의 비전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들마이어는 人間(인간)의 本質(본질)의 특성이 有機性(유기성)과 精神化(정신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현대사회를 中心(중심)상실의 시대라고 하였다. 현시대가 無機的(무기적)인 것에 빠져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生命(생명) 없는 환경 속에서' 人間(인간)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라고 우려하였다. 현시대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어디 제들 마이어 뿐이겠는가? 이 無機的(무기적)인 人間(인간)의 현실로부터 삶은 어떠한 精神(정신)과 存在方式(존재방식)으로 새로운 地平(지평)을 바라볼 수 있을까?

현대 도시 空間(공간)의 특징은 일(事)의 空間(공간)으로만 채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觀對的(관대적)으로 思考(사고)의 空間(공간)을 잃어 가고 있다. 物質空間과(물질공간)과 精神空間(정신공간)이 모두 채워져, 그 사이가 없으므로 여유공간, 즉 思考(사고)의 空間(공간)이 없는 것이다. 사이가 없는 공간은 만남이 없는 공간이며, 고인 늪처럼 부패하는 공간이다.

나에 있어서의 存在(존재)는 內的(내적) 충동이나 外的(외적) 對象(대상)이 아니며, 感覺的(감각적) 事物(사물)도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地帶(지대)로부터 流出(유출)되어 다시 原生(원생)으로 돌아가는 生(생)의 연속체, 즉 生(생)의 軌跡(궤적)이다. 이것은 生(생)의 構造(구조)이다. 나는 이러한 생의 구조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나에게 있어서 흰 화면은 의식의 餘白(여백)이며 思考(사고)를 담는 그릇이며, 思考(사고)의 터전이다.

최근에 나는 종이에 水彩(수채)를 하였다. 書體性(서체성)을 드러내면서 붓자국을 事物化(사물화)하고 現象化(현상화)하였다. 물의 凝集性(응집성)과 擴散力(확산력)을 이용하여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서 自生體的(자생체적) 조건을 이루게 한다. 원래 書體(서체)란 정신과 몸, 붓, 물감이 화면과 함께 호흡하면서 만남의 場(장)을 이루는 生命(생명)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書體(서체), 그 자체가 하나의 獨自的(독자적) 生命體(생명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화면은 곧 또 하나의 生命體(생명체)로서의 構造(구조)를 갖게되는 것이다. 生命(생명)이란 自然(자연)이다.

書道精神(구도정신)이란 自然(자연)의 질서와 순리에 순응하는 겸허한 자세와 태도를 말할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修身(수신)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정신과 意志(의지)가 있어야만 도달되는 깨달음의 경지이다. 전통 서화 정신의 주제는 生命性(성)이며, 植物(식물)적 構造(구조)에 밀착하는 정신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格(격)이라 하고 이것이 잘 갖추어진 것을 品格(품격)이 있다고 한다. 品格(품격)은 곧 人格(인격)이며,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하나의 비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서구인들의 思考(사고)의 軸(축)이 現存(현존)에 있으며 그 특성이 의식의 자기확장에 있다면, 동양인들의 思考(사고)의 軸(축)은 全存在(전존재)에 있으며 의식의 환원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서의 그림이란 현실을 재현하는 일도 아니고, 그림의 허구성이나 평면의 자기확인도 아니며, 思考(사고)의 場이다. 그것은 나와 현실 사이에 위치하는 의식의 여백이요, 의식의 바다이다.



ref. 1983년 3월 24일 - 29일 공간미술관 <이동엽 수채전 - 의식의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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