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 <이동엽의 '생성과 소멸의 미학'>

Critique 평론 1985. 3. 16. 23:42
이동엽의 생성과 소멸의 미학




이른바 '白色(백색) 모노크롬' 회화. 1975년을 전후해서 태동되고 그 후 70년대에 걸쳐 우리 화단의 한 주류를 이루었던 이 경향은 오늘날에 와서도 몇몇 주요 화가들에 의해 한국 회화의 가장 근원적인 미학으로 꾸준히 추구되고 있다. 이들 화가 중에서도 특히 30대의 화가로서 우선 손꼽히는 화가가 바로 李東熀(이동엽)이다. 패기만만한  젊은 화가로서 그이처럼 10년 남짓 동안을 부단한 自己漂白(자기표백)에 가까운 금욕적인 작업으로 일관해 온 경우도 드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앙데팡당전 창설 당시부터 주목을 끌기 시작했던 이동엽의 당시의 작품은 유리컵과 얼음,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취를 감추어 가는 유리컵의 형성과 녹아 가는 얼음의 이미지로 된 아주 단순한 화면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물들은 차츰 그 모습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가 소멸되어 가며 마침내 화면은 작가 자신의 말을 빌리건데 '원초적인 지대(太虛 태허)'로 되돌아 간다. 그리하여 화면에는 마침내 그 虛(허)의 중심대라고도 할 수 있는 수직의 엷은 획만이 남는다.

이동엽이 화면을 전적으로 음영이 전혀 없는 흰색으로 덮어 버리는 것은 이 빛깔 아닌 빛깔이 가장 자연스러운 색채라는 그의 주장에서 오는 것이기는 하나 그 주장에는 보다 깊은 이 화가의 자연관이 깔려 있는 듯 싶다. 그에게 있어 虛(허)는 처음부터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 현상이 끝내 귀결하는 하나의 완결된 상태이다. 말하자면 자연 본연의 상태라는 말이다. 거기에다 그는 더 무엇을 덧불일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는 모든 것, 모든 자연 현상을 소멸해 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와 함께 모든 물질적인 것, 색채를 포함한 감각적인 모든 것이 생성, 소멸해 간다. 그러나 그 소멸은 단순히 현상형(현상성)의 소멸일 따름이며 오히려 이로 해서 자연은 본연의 實存(실존), 즉 그득찬 虛(허)에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동엽의 표백된 흰 공간은 어디까지나 실체를 지닌 공간이다. 그것은 스스로 번지며 또 스스로 수축한다. 어쩌면 번져 가는 것은 자연의 본질이요, 수축되는 것은 공간의 '身體(신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한은 신체를 갖춤으로써 비로소 스스로를 드러내며 그것이 제한된 캔버스 속에서 하나의 小宇宙(소우주)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바로 작가의 신체와 상응하는 소우주이다. 실상 그에게 있어 그린다는 행위는 곧 화면과 자신의 신체를 합일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의 신체도 모든 존재물이 그러하듯이 하나의 중심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대가 곧 虛(허)를 '있게' 하며 그 허는 한편으로는 사라져 가면 또 한편으로는 중심을 향해 공간으로써 자신을 규정한다. 평붓으로 단 한 번의 넓직한 획을  그어 내리는 행위는 바로 공간 규정의 행위이며 중심부에서 멀어져 갈수록 역시 대칭적으로 엷어져 가는 앰배색의 變調(변조)는 그대로 무한의 공간에로 확산되어 간다.

솔직히 말해서 이동엽의 회화는 쉽게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그림이다. 부질없는 모든 言表(언표)를 거부하는 듯 고집스럽게 가능한 한 스스로를 숨기려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멸되어 가는 모든 현상적인 것, 감각적인 것을 넘어서 있을 본연의 그 어떤 상태에 대한 희구의 표명이라 생각된다.



1985. 3.
李逸(이일) (미술평론가)


ref.  1985년 3월 20일(수) - 26일(화) 윤 갤러리 <이동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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