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상 <이동엽의 축에 관해서>

Critique 평론 1992. 6. 24. 08:10
이동엽의 축에 관해서

유준상 (미술평론가·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무엇보다도 먼저 무색무형의 하얀 素地(소지)가 있다. 무색무형이라는 것은 지금 보고 있는 이동엽의 화면인 被視(피시체)의 恒常性(항상성)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우리들의 시각이 그것을 그처럼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눈은 단순한 물리적 장치가 아니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무색무형이라는 것은 따라서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의 직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공간은 그 무한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하게 닫혀진 하나의 통일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 공백이란 있을 수 없다. 어디를 보아도 무언가가 도처에 있다 한 알의 흙으로부터 풀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여운이 흐르고 산들이 굽이치며 푸른 하늘이 있고 무한한 저편에 별빛이 반짝이고 있다. 바꿔말해서 무언가가 우리들의 눈으로 비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령 자연이라고 하자. 또는 그렇게 비쳐 들어온 그 무엇들을 마치 그물처럼 聯想綱(연상강)으로 짜서 색으로 배열하고 형으로 구성한 하나의 풍경화라고 하자. 거기에는 어떤 공백도 없다 .

공백이라는 것이 미술의 문제로 제기된 기원은 동양에서였다. 흔히 여백이라는 말로도 표현되고 있는 이 인식의 패턴은 멀리 伏羲帝(복희제)까지 소급되는데 그것은 우주(세계)를 분석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데서 인식되었던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의 미술계 주변에서 자주 인용되던 노자의 「타오(Tao)」인 空白(공백)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공백을 이름(말)이 없는 하늘과 땅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非在(비재)이며 들을 수 없는 沈默(침묵)이며 만질 수 없는 虛(허)라고 했다. 이러한 무색무형이 元始(원시)이며, 이로부터 음양이 상대되는 두 개의 에너지를 중개로 해서 그 원시가 틀 잡아나간다고 했다. 원시를 틀 잡는다는 건 균형을 잡는다는 뜻이며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발라스트이고 공자 말씀을 따르면 중용이라는 게 되겠다. 공백은 따라서 자신의 개별성이라던가 名儀(명의) 또는 주체성을 잃고 원시의 단순함으로 회저하여 침묵(공백)속에서 우주와 융합하고 동시에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게 된다.

이러한 우주관은 물론, 논리적 추리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그것을 터득할 때 지시하는 건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에게 목표는 있지만 인간생명과 직결되는 가치관은 없다. 그래서 20세기 전후의 세계미술은 이러한 원시로부터 귀납적으로, 새로운 표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던 거며, 현대미술의 발상이 동양사상으로부터 다른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고도 말해지기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공백은 연상이 가능한 한계의 넓은 범위로 마치 공기가 충만하듯이 번져나가려는 힘인 것이며 이것의 파악은 직시적이지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70년 후반의 한국현대미술의 한 주류가 이러한 번짐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이동엽이 있었다.

그의 하얀 화면의 중추에 임의로 세워진 수직축이 있는데 그것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미묘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까지의 경과는 무언지 모르지만 하얀 소지의 중심부에 쪽 바른 수직축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의 눈(각막)을 묘사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뇌는 그 형상에 관해서 무엇도 보고하는 게 없다는 걸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이 무언지 모른다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수직축이 미묘한 진동을 보이고 있다고 한 건, 세워진 하나로 주욱 그어진 수직의 윤곽이 미묘한 차이의 濃淡(농담)으로 서있기 때문에, 마치 수직의 강철을 쳤을 때 한동안 좌우로 진동하면서 여음을 내고 있는 현상처럼도 느껴지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 음을 「도」라고 했을 때 그 음파와 음의 감각은 전혀 다르다. 다르게 말해서 「도」라는 음의 음파의 기호이며 동시에 그 음의 기호라는 뜻이다.

회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의 배열은 따지고 보면 이러한 기호들의 배열로서 이룩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동엽은 그 기호를 생성의 단계에서, G·바슈랄의 견해처럼,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시간구조 속에서 원시적으로 환기해보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뒤틀려진 나무의 이미지는 그처럼 뒤틀리면서 자라나는 생성의 이마쥬넬의 파악이라는 비유이다.

앞에서 인용한 복희제는 하늘을 보고 하나의 선을 그어, 태극기의 陽極(양극)처럼 기본적인 상징기호로 삼았는데 이동엽은 그 「態動的完全(태동적완전)」을 나타내는 기호를, 앞의 음과 음파의 관계처럼 그것이 태고로부터 잉태해 온 秘義(비의)의 진동으로부터 전수한다는 태도로부터 자신의 예술표식을 환기해 온 작가였다. 그래서 십 년 전의 초기단계의 그의 작업은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었으며 오늘까지 이 일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의 작업은 이렇듯 초기단계로부터 비교적인 우주인식의 고원한 메아리를 뒤쫓았던 것이어서 멀고 넓고 깊으며 어려웠다. 현대미술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세는 가능성의 많은 부분을 배제하려는데서 야기되고 있지만, 바로 이 배제된 영역이야말로 현대미술이 해명해야 될 중요부분임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ref. 1992년 서울 코아트 갤러리 이동엽 개인전 - 존재적 명상과 순환의 역동적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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